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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관 2022-06-16 21:45:00
흑산도 여행
흑산도 여행

필자는 1여 년 전 영화 ‘자산어보’를 보고 감동하여 흑산도와 자산어보에 관한 책을 탐독하다가 이번 6월 황금연휴를 맞이하여 광주에 정착한 후배 의사, 도사(道士)와 같이 3박 4일 일정으로 흑산도, 비금도, 도초도를 여행하였다.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은 여행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배는 만원이었다. 코로나로 인해서 2년 넘게 발이 묶여 있었던 국민들이 다시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쾌속선은 거침없이 달렸고, 낮은 구름과 바다 안개로 인하여 아스라이 보이던 섬들이 점점 뚜렷하게 다가오고 다시 사라지는 장면은 몽환적이었다. 필자와 도사는 배의 2층 갑판 위로 올라가서 주변 바다를 감상했는데 항로 왼쪽으로 우이도(牛耳島)가 보였고 섬의 고도 3분의 2쯤에 수평 구름이 쫙 펼쳐져 섬의 꼭대기가 가려진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목포에서 출발한 배는 93km를 달려서 약 2시간 만에 흑산도에 닿았다.
선창(船窓)에서 바라본 흑산도는 그 이름처럼 검게 보였다. 흑산도에는 후박나무, 사철나무, 동백나무 같은 짙푸른 상록활엽수들이 많이 자라고 전부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서 검게 보이는 것이다. 정약전(丁若銓)은 흑산도로 유배 오면서 黑山島의 黑자가 너무 불길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黑자로 인하여 고향으로 못 돌아갈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黑자를 써야 할 곳에 그윽한 의미의 검다는 뜻인 玆자를 썼다. 그래서 黑山魚譜가 아니라 玆山魚譜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한때는 玆자가 검다는 뜻일 때는 玄자와 같이 ‘현’으로 발음되니 자산어보를 ‘현산어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대두되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우려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약전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절해고도에서 죽었다.
흑산도에 도착하자마자 필자가 한 달 정도 짠 여행 일정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일정은 첫날에는 흑산도 유람선을 타고 섬 주위를 일주하는 것이었는데, 최소 승선 인원 30명이 채워지지 않아서 배가 출발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는 대신에 관광버스를 타기로 했다. 관광버스는 흑산도 해안일주도로 25.4km를 한 시간 반 만에 돌았다. 완전히 수박 겉 핥기였다. 버스 기사는 운전하면서 마이크를 통하여 승객들에게 끊임없이 관광 안내를 했다. 그중에 필자가 생각나는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코로나로 인하여 지난 2년 4개월간 흑산도에 관광객이 끊겨서 주민들이 굶어 죽게 되었다. 관광버스도 원래 14대 운행하였었는데 지금은 4대만 운행한다. 관광객들은 돈을 많이 쓰고 가기 바란다. 주머니는 가볍게 양손을 무겁게 하여 흑산도를 떠나기 바란다. 둘째, 가거도(可居島: 일제 강점기에는 소흑산도라고 불렸다)에서 새벽에 귀를 기울여 들으면 중국 산동(山東)반도의 칭따오(靑島)시의 닭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곳이 중국과 가깝다. 목포와 흑산도 거리의 3.5배만 가면 중국이 나오니 과장은 아니다. 사실 백령도는 인천보다 산동반도에 더 가깝다. 셋째, 약전이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하다가 혹시 유배에서 풀린 동생 약용이 자신을 찾아올 때, 육지에서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맞이하고자 우이도에 옮겨 살다가 결국 동생을 못 만나고 우이도에서 죽었다. 그 말을 듣고 필자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버스는 세 번 섰다. 상라산 전망대에 있는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에서 사진 찍을 시간 15분을 주었다. 인근 대장도 소장도와 멀리 구름에 아스라이 가려진 홍도를 배경으로, 또 노래비를 배경으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가까운 상라산성에 올라갈 시간은 주지 않았다. 그런데 버스 기사는 정약전의 유배 마을 사리(沙里)를 그냥 스쳐 지나가면서 대충 설명했고 사진 포인트 한 곳에서 5분간 사진 찍을 시간을 주었다. 면암 최익현의 유배지 천촌리도 그냥 지나가면서 최익현이 바위에 새겼다는 ‘기봉강산 홍무일월’이라는 여덟 글자를 말했다. 버스 기사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외워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집 앞에 버스를 세웠는데 그 집은 관광객들을 상대로 후박나무껍질과 까나리액젓 등을 팔았다. 흑산도 동쪽에 있는 영산도 근처를 지날 때 영산도 3분의 2 높이에 수평으로 드리워진 분홍색 구름에 감탄하여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우리 두 사람은 흑산도 버스 관광에 크게 실망했다. 알아본 바로는 택시 관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택시를 타고 원하는 곳에서 충분히 정차하여 흑산도 풍경을 관람할 시간을 가지면서 일주하려면 40만원을 내야 한다고 했다.
도사와 필자는 짧은 버스 관광 후 홍어회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흑산도 관광이 잘못되었다고 한탄했다. 그래서 다음날은 도보로 일주도로를 걸으면서 해안가 마을을 직접 방문하고 주민들도 만나는 여유를 가지면서 풍광을 즐기기로 했다. 그런데 흑산항에서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까지는 가파른 열두 구비 상나리고개를 넘어야 해서 50대 중반 두 남자들이 오르다가 심장마비에 걸리기에 딱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거기까지는 만오천 원을 내고 택시를 탔다. 전날 버스 투어 때 못 올라갔던 상라산성(上羅山城)에 올라갔다. 흑산항과 주변 대둔도, 다물도 등 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흑산항은 내·외(內外)영산도를 방파제로 연결하여 섬의 규모에 비하여 아주 크게 만든 항구였다. 흑산항에서 60-70년대 풍어(豐漁) 시절에 거대한 고등어·조기 파시(波市)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상라산성 자체는 최근에 관광을 위하여 급조한 듯 왜소하고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신라 후기 흥덕왕 때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 소탕 겸, 중국, 일본과의 중계무역을 할 때 흑산도에 산성 또는 봉화대를 쌓았다는 기록과 그 흔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거나, 무역선과 사신선의 도래를 아래에 있는 포구에 알리는 봉화대의 위치로는 상라산성 터가 딱 좋을 것 같았다. 고려시대에 흑산도는 배편으로 개경으로 가는 송나라 사신들이 머무는 중간 기착지였고, 무역항 역할도 했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머문 소감을 글과 그림으로 편찬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흑산도에는 사신이 머무는 관사가 있었다고 표현되어 있다. 중국 저장성(浙江省) 닝보(寧波)에서 출발한 사신선은 중간에 흑산도에 머물러서 물과 식량을 공급받고 다시 북상하여 군산 앞바다를 지나서 개경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서해에는 삼국시대부터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 두 개의 항로가 있었다. 하나는 산동반도 떵저우(登州)에서 출발하여 황해도 옹진반도를 지나서 개경 벽란도로 들어오는 북선항로(北旋航路)이고 또 하나는 위에서 말한 닝보를 출발하여 흑산도를 지나서 벽란도로 올라가는 남선항로였다. 북선항로가 거리가 짧아서 순풍을 받으면 2,3일 만에 목적지에 도달하는 장점이 있었지만 풍랑이 심해서 배가 전복되는 일이 많았다. 심청전(沈淸傳)은 이 북선항로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얼마나 풍랑이 심했으면 처녀를 제물로 바쳐서 바다를 건너야 했을까! 반면에 남선항로는 길이가 길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하여 고려시대까지 많이 이용되었다. 남선항로의 중심에 흑산도가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흑산도에는 중국과 일본의 무역선과 어선들이 즐비하게 오갔던 것이다.
이렇게 고려시대까지 섬(島)은 대륙과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소통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는 고립(孤立)의 표상이 되었다. 조선 500년 동안 바다로 진출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금한 해금(海禁)정책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은 외국 무역선과 거래하는 것을 엄벌에 처했다. 조정은 왜구로부터 주민들을 지켜줄 수 없자 섬을 비우는 정책을 썼다. 이를 쇄환(刷還) 정책 또는 수토(搜討) 정책이라고 한다. 쇄환은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빗자루로 쓸 듯이 쓸어서 육지로 데리고 온다는 뜻이고, 수토는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수색하여 토벌한다는 뜻으로 쇄환과 사실상 같은 뜻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이 정책을 섬을 비운다는 뜻의 공도(空島)정책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울릉도는 조선말기까지 완전히 비워진 반면에 흑산도는 임진왜란 이후 사람들이 몰래 들어가서 살기 시작했고 조정에서는 이를 묵인했다. 그 후 흑산도는 17세기부터 유배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서 죄인들이 도망 나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섬은 죄인만 도망하기 힘든 것이 아니라 섬 주민들도 뭍으로 나오는 것이 원천 금지되었다. 섬에서 태어난 사람은 섬에서 살다가 섬에서 죽어야 했다. 이를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이라고 한다. 조선 정부는 섬 주민들에게도 가혹한 공물(貢物), 노역(勞役), 군역(軍役)을 부과했다. 그래서 이를 이행하지 못하는 섬의 남자들은 어선 사고사(事故死)를 위장하여 섬을 탈출했다. 탈출한 남자들은 다시는 섬에 돌아갈 수 없었다. 실제로 남자들은 어로 활동 중에 풍랑을 만나서 죽는 일도 많았다. 그래서 흑산도와 제주도와 같은 도서 지역은 남녀의 비가 극도로 불균형을 이루었다. 조선의 섬들은 무인도(無人島)이거나 감옥(監獄)이었다.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흘러 온 나그넨가 귀양살인가,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그리다가......’ 흑산도 아가씨의 작사가 정두수는 1960년대 당시의 흑산도, 아니 대한민국 섬들의 분위기를 정확히 묘사했다. 그 당시만 해도 섬 여자들이 섬에서 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었다.
도사는 우리가 해안일주도로를 걸을 것이 아니라 섬 중간에 난 산길을 가로질러 가면 섬 반대편에 있는 정약전의 유배지 사리(沙里)에 더 일찍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산길을 걷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흑산도는 산등성이를 따라 400미터 정도 높이의 봉우리가 세 곳 있고 해군 레이더기지도 있으며 깎아지른 절벽도 있어서 위험할 것 같아서 포기했다. 다만 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흑산도 주변 섬들이 상세히 보이고, 서쪽으로 홍도와 동쪽으로는 신안군 일대의 모든 도서들과, 목포 시내도 보여서 경치는 상당히 좋을 것 같았다. 다음에 흑산도에 갈 일이 있으면 산길 여행을 해야겠다.
우리는 해안일주도로를 따라서 걸으면서 청자빛 바다 색깔에 감탄하고, 이웃 대장도의 아기자기한 풍광에 찬사를 보내고, 대장도 꼭대기에 있다는 습지(濕地)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흑산도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대부분 빨갛게 말라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도로에 간간이 나붙은 현수막에는 ‘솔껍질깍지벌레 퇴치’라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재선충이 아닌 솔껍질깍지벌레에 의하여 흑산도 소나무들이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이 벌레가 지구온난화로 더 증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륙이나 섬이나 침엽수림들이 지구온난화로 급속히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우리는 걸으면서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걷는 속도로는 도초도로 가는 마지막 배가 떠나는 시각인 오후 4시까지 다시 흑산항에 도착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나가는 아무 차나 잡아 타기로 마음 먹었다. 소위 히치하이킹(hitchhiking)을 하는 것이다. 소형 트럭이 지나가기에 무조건 손을 흔들었다. 트럭이 섰다! 도보 여행객이라고 말하고 트럭이 가는 목적지까지만이라도 태워달라고 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운전자는 흔쾌히 수락했다. 트럭을 얻어 타고 가면서 운전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운전자는 어물 중개업을 하는데 원래 서울에서 중개업을 하다가 경쟁이 너무 치열하여 부산으로 옮겼다가 10년 전에 흑산도에 들어왔다고 한다. 가족들은 목포에서 살고 있고 자신이 배를 타고 가족을 만나러 왔다갔다 한단다. 자신의 일 년 수입이 수억 원에 달한다는 암시를 주었다. 그는 흑산도에 주소를 둔 인구가 4천 명 남짓이지만 실거주인은 1천5백 명 정도라고 했다. 외지인의 뱃삯은 4만원이 넘지만 흑산도 주민에게는 천원밖에 안 받는 등 정부가 섬주민들에게 파격적인 혜택을 많이 주니 주소를 흑산도에 두는 것 같다. 운전자는 자신의 목적지인 비리라는 마을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그분 덕분에 우리는 도보 거리를 3분의 1 정도 단축한 것 같다. 우리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비리는 비췻빛 앞바다에 전복 양식을 많이 하고 있었다. 서해 하면 보통 진흙 벌에 칙칙한 바닷물 빛이 연상되는데 흑산도는 에메랄드빛 청청 해역이었다. 계속 걸어서 지푸미(深里)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앞에는 마을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는 비석이 있는데 흑산도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지푸다’는 ‘깊다’의 전라도 사투리이고 ‘미’는 ‘마을’의 사투리인 것 같다. 이 마을에는 육영수 여사가 이 마을 초등학생들을 초청하여 군함으로 서울까지 데리고 가서 청와대와 서울을 견학시킨 사연과 사진을 찍은 현판이 걸려있었다. 지푸미를 지나서 한다령(恨多嶺)을 넘었다. 글자 그대로 한 많은 고개인 것 같았다. 택시로 지나온 상나리 열두구비 고개처럼 꼬불꼬불하고 경사진 길이 계속 이어졌다. 다만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도사는 녹음을 계속했다. 한다령 정상부에 해안일주도로 준공기념비가 서 있는데 신안군의 1004개 섬을 상징하는 천사상(天使像)이 있었다. 일주도로는 1984년에 착공하여 27년 만인 2010년에 완공되었다. 울릉도 일주도로가 착공 60년 만에 완공한 것에 비하면 짧은 편이나 바위투성이 길이 매우 경사지고 구불구불한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역경을 거쳐서 완공되었을 것 같다.
드디어 정약전의 유배지 모래미(沙里)에 도착했다. 모래사장이 펼쳐진 앞바다 역시 청잣빛으로 아름다웠다. 드문드문 밭이 보였다. 흑산도에서 유일하게 농사가 가능한 마을이라고 한다. 그래도 논농사는 어림도 없었다. 마을에는 유배문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주로 조선시대 후기에 흑산도로 유배 온 사람들을 소개하고, 자산어보에 소개된 물고기들의 그림과 설명이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특이하게 고려시대 인물들도 있었는데 모두 최씨 무신정권에 항거하다가 귀양 온 사람들이었다. 무신정권이 강화도를 도읍지로 삼았기에 유배지로도 섬을 애용한 것 같다. 마을 중턱에 비각이 세워있고 안에 비석도 서 있었다. 비석은 만든 지 오래되어서 풍화되어 해독이 안 되는 글자도 있었다. ‘慶州李氏孝烈紀行碑라는 제목 하에 한자로 행적을 칭송하는 글이 쓰여 있었다. 해석해 보니 이씨 부인은 남편을 일찍 여의고 복중 태아를 정성껏 길렀으며 시아버지에게 효도를 다하고 한 달에 두 번 남편 제사에 온 정성을 쏟았다. 그리하여 효심이 하늘에 닿고 남편을 향하는 정절이 만인을 감동시킨 바 모든 선행의 근본을 이루었고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으뜸을 이루어 열녀비를 세워서 만대에 추모한다는 내용이었다. 전형적인 조선후기 열녀비의 내용이다. 그래도 남편을 따라 죽었다는 내용이 없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조선후기에는 열녀비를 세우기 위하여 주변 강압에 의해 자살한 여성이 많았다. 이 비석은 흑산도에 귀양 온 선비들에 의하여 유교적 도덕과 예법이 주민들에게도 널리 퍼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약전이 아이들을 가르쳤던 사촌서당(沙邨書堂) 들어가려니 대문에 復性齋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復性은 주자(朱子)가 쓴 대학(大學) 서문(序文)의 문장 敎之以復其性의 약자로서 교육을 통하여 인간의 착한 본성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이는 정약전이 조정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천주교를 버리고 성리학 본연의 가르침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내외에 공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약전은 흑산도 아이들에게는 유학만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를 받아들이면서 같이 배운 서양의 기하학, 천문학 등 서학(西學)을 통하여 실험정신도 배웠던 것 같다. 어부 장창대(張昌大)의 도움을 받아서 흑산도 물고기를 직접 해부하고 분류하여 자산어보를 집필했다. 당시로서는 사대부가 물고기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해부하여 책을 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는 당시 실학자들이 주창하던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의 표본이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즉 지구가 한반도보다 훨씬 넓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표해록(漂海錄)을 편찬했다. 표해록은 우이도에서 살던 어부 문순득이 풍랑을 만나서 유구국(오키나와), 여송국(필리핀)까지 떠내려 갔다가 베트남, 중국 광동, 복건, 북경 그리고 조선 의주를 거쳐서 구사일생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이야기를 약전이 듣고 적은 일종의 표류기다. 그리고 그는 백성들이 조정의 잘못된 송금(松禁)정책 즉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는 정책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송금정책을 폐지하고 오히려 소나무 심기를 권장하는 정책으로 바꿀 것을 건의하는 송정사의(松政私議)를 쓰기도 했다. 송정사의란 소나무 정책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뜻이다. 약전은 철저히 백성들의 이익 즉 이용후생(利用厚生)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에 반하여 동생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저서를 통하여 성리학적 질서 안에서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당시 소위 실학자라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성리학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약전은 공리공론(空理空論)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넘어서 진정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할 방안으로서의 실학(實學)을 연구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약전은 조선 최초의 진정한 실학자이며 흑산도는 조선 실학의 산실(産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사리(沙里)에는 약전이 자산어보를 집필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흑산도 어부 장창대를 알리는 글이 없어서 아쉬웠다. 그런데 약전이 寄張昌大(장창대에게 부친다)라는 제목 하에 쓴 한시를 비문에 새겨서, 약전이 장창대의 학문을 사랑하는 마음을 칭찬한 내용을 소개한 것은 보기에 좋았다.
사리(沙里) 구경을 마치고 각자 막걸리 한 병을 마시면서 언덕길을 오르다가 둘은 깜짝 놀랐다. 자전거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 오고 있었다. 수십 대의 자전거가 올라왔는데 모두들 자전거 복장을 완벽하게 갖추어 타고 있었다. 여자 라이더도 상당히 있었다. 모두를 오래 자전거를 탄 덕분인지 대퇴사두근은 터질 듯이 빵빵했다. 여자 라이더가 힘차게 언덕을 올라가는 뒷모습은 섹시하게 느껴졌다. 허리가 굽어서 양 엉덩이의 좌우 균형이 맞지 않는 한 라이더가 꼴찌로 낑낑거리면서 올라가기에 응원의 박수를 힘껏 쳐주었다. 그 라이더가 하는 말이 ’내 나이가 팔십이 넘었소!‘ 팔십 노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전거로 언덕을 넘었다! 지난해 지리산에서 팔십 노인이 산을 가볍게 타는 것을 보았는데, 올해는 흑산도에서 자전거로 해안도로를 완주하는 팔십 노인을 본 것이다. 필자와 도사는 할 말을 잃었다! 인간에게 도대체 불가능한 것이 있는가? 기적은 필자가 가는 곳마다 일어나고 있었다!
마침 지나가는 소형 트럭이 있어서 다시 얻어 탔다. 이번에는 트럭 짐칸에 탔다. 우리가 최익현의 유배지 천촌리까지 간다고 하니 운전자는 도중에 차를 세우고 천촌리가 어디냐고 다시 물었다. 짐칸에 낚싯대와 성게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외지에서 온 낚시꾼인 것 같았다. 그들은 한참을 달려서 우리를 천촌리에 내려주고 되돌아갔다. 그들의 목적지를 지나쳐서 우리의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되돌아간 것이다. 그들의 마음 씀에 너무 감동하여 떠나는 트럭의 뒷꽁무니에 대고 몇 번 절을 했다.
천촌리에는 후대에 세운 면암 최익현의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 뒤 지장암(指掌巖) 이라는 바위에 최익현이 손수 조각했다는 箕封江山 洪武日月이라는 여덟 글자가 있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설명서 현판에는 ’독립된 대한민국‘이라는 뜻이라고 적혀 있었다. 필자가 도착했을 때 마침 한 관광택시 기사가 승객들에게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최익현은 조선 최초의 외국과 맺은 근대식 조약인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극력 반대하는 지부상소(持斧上疏: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거든 자신이 가지고 온 도끼로 목을 치라는 것)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2년 유배되었다. 箕封江山은 기자(箕子)가 봉(封)한 강산이라는 말이고, 洪武日月에서 洪武는 명태조 주원장의 연호다. 즉 洪武日月이라는 것은 명나라의 日月(시간)이 여전히 조선 땅에서 흘러가고 있다는 의미다. 조선 선비들은 단군(檀君)조선을 부정했다. 그리고 은나라 사람 기자가 주나라에 의하여 은나라가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하여 세웠다는 기자조선을 신봉하고 제사를 지냈다. 조선의 선비들은 명나라가 망한 후에도 조선이 망할 때까지 300년 동안 명나라를 모셨다. 그 중화사상(中華思想)의 끝판왕을 우리는 최익현의 여덟 글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조선 선비들에게 있어서 조선은 자주독립국이 아니라, 한족 명나라의 영원한 속국이었다. 최익현은 조선 500년 폐쇄성의 마지막 상징이다. 조선은 해금정책으로 500년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고, 문명적으로는 퇴보에 퇴보를 거듭했다가 외세에 의하여 강제 개항하는 순간부터 급속히 망하기 시작되었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직시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고 발전했다. 더 이상 흑산도의 관광버스, 택시 기사들은 뜻도 모르는 ’기봉강산 홍무일월‘을 관광객들 앞에서 녹음기처럼 암송하지 말고, 그 뜻을 정확히 알아서 관광객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아무튼 두 번의 히치하이킹 성공으로 우리는 무사히 흑산도 해안일주도로 도보여행을 마쳤다. 두 운전자들의 따뜻한 마음에 다시 한 번 감사한다. 우리가 일주하는 동안 관광버스와 관광택시는 여러 번 지나갔지만, 마을버스는 한 번도 지나가지 않았다. 흑산도 교통은 아직도 열악한 것 같다. 흑산항에 도착하니 도초행 배의 출발 시간이 한 시간 넘게 남아서 필자는 도사와 막걸리에 홍어삼합을 먹으면서 흑산도 여행을 회상해 보았다. 흑산도는 신라와 고려시대의 무역항으로서의 번영을 다시는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 무인도 또는 유배지로서의 치욕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60-70년대 파시(波市)의 영광도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청정자연에서 김, 미역, 전복을 양식하고 홍어 등을 잡는 어촌으로, 비췻빛 바다의 아름다운 관광지로 그 명성을 유지할 것이다. 흑산도와 인근 군도를 다 돌아보는 데는 최소 1주일은 잡아야 할 것 같다. 우리는 흑산도 관광 활성화를 위하여 수박 겉 핥기 식의 관광 안내를 지양하는 등 개선할 것이 많다는 결론을 내렸다.
2022년 6월 16일
김홍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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