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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관 | 2022-06-16 21:48:00 | ||
도초비금도 여행 | |||
흑산항에서 오후 4시 20분에 출발한 배는 순항하여 5시 20분에 도초항에 입항했다. 도초항 어귀에 마을 이름을 알리는 큰 둥근 비석이 놓여있었는데 불섬마을(火島里)라고 씌어 있었다. 마을 이름이 불섬이라니 여러 가지 상상이 들었다. 이 마을의 야간 고기잡이 배의 불(漁火)이 밝아서 그리 지었는지, 아니면 이 마을에 불을 밝혀서 등대 역할을 해서 그리 지었는지 모르겠다. 우선 나여사님이 예약해 둔 모텔에 짐을 부리고 나서 도초도와 비금도를 잇는 다리인 서남문대교를 걸었다. 다리는 대략 1km 정도 되었고, 중간이 높이 솟은 아치형이었다. 다리 중간에 서니 40km 가량 떨어진 흑산도가 아스라히 보였다. 도초도는 신라 시대 당나라와의 무역항이 있었는데 당나라 사람들이 도초도가 당나라의 도읍(都邑)인 장안(長安)과 비슷하고, 말에게 먹일 풀들이 많아서 도초도(都草島)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비금도는 섬 모양이 새가 나는 모양과 같아서 비금도(飛禽島)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1996년 두 섬을 잇는 서남문대교가 개통되면서 도초비금도라고 붙여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신안군의 압해도는 목포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압해도는 다시 7km의 천사대교를 통하여 암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많은 섬들이 다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앞으로 10년 안에 흑산군도(黑山群島)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안군 내 유인도(有人島)들은 육지와 연결될 것 같다. 그날 저녁에는 오후 3시까지 흑산도 일주도로를 걸었던 피곤함이 밀려와서 일찍 저녁을 먹고 잤다. 다음날 도초도에는 일기예보대로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불섬마을에서 관계수로를 따라서 섬안 쪽으로 산책을 했는데 팽나무 10리길이 눈에 들어왔다. 10리 즉 4km에 걸쳐서 팽나무 숲길을 조성해 놓았는데 정말 운치가 있었다. 팽나무는 여수, 영암, 해남, 강진 등 이웃 군에서 이식한 것들이었다. 길을 따라 심어놓은 꽃들과 팽나무들이 아주 잘 어울렸다. 우리는 오락가락하는 비를 맞으며 걸었지만 기분이 참 좋았다. 관계수로를 따라서 논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흑산도는 평지가 없어서 사리(沙里)에 작은 밭이 전부였지만 도초도는 논이 넓었다. 그런데 휴경지가 상당히 많아서 왜 농사를 짓지 않을까 의아해 했는데 의문은 곧 풀렸다. ‘바나나 농장부지’라는 간판이 크게 보였다. 조만간 도초도에 대규모 바나나 농장이 들어설 모양이다. 지구온난화를 실감했다! 관계수로와 팽나무 길이 끝나는 곳에 저수지가 있고 그 위에 영화 ‘자산어보’ 세트장이 있었다. 세트장까지는 포장길이어서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우리도 세트장에서 사진을 몇 컷 찍었다. 세트장 앞에는 자산어보의 명장면들이 큰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근처에 있는 수국공원에 들렀는데 한창 공사 중이어서 아직은 썰렁했다. 다만 경기도 하남시와 도초도가 자매결연하여 공원을 만들고 있다는 안내판이 인상적이었다. 공원이 완성되면 아름다운 수목원이 될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니 비금도 신안대우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도사의 아내가 합류했다. 그리고 나여사님이 우리 세 명에게 점심을 사주었다. 푸짐한 점심에 반주를 거나하게 먹고 나니 비가 쏟아졌다. 나여사님은 집으로 가시고 우리 둘은 도사 아내의 차를 타고 비금도를 돌아다녔다. 폐교를 개축하여 만든, 바둑인 이세돌 기념관을 지나갔고 명사십리해변에서는 비를 맞으며 뛰어다니기도 했다. 비금도도 논과 염전이 상당히 넓었다. 갈수록 비가 많이 오니 도사가 어디 비를 피할 수 있는 정자 같은 곳을 찾아서 술이나 마시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도사는 어느 마을을 지나면서 노인에게 ‘술 마실 좋을 장소가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노인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 집이 누추하지만 술 마시기에 참 좋습니다.’라고 하면서 당장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쭈뼛쭈뼛하면서 할아버지를 따라서 집으로 들어갔다. 집은 정원에 가지가지 꽃들이 피어있었다. 마침 할머니도 계셨는데 생면부지의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방금 조카 부부와 그 자녀들이 다녀가서 이제 좀 쉬려고 했는데 또 손님이 들이닥쳤는데도 싫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할머니는 차와 과일을 내오고 막걸리도 내왔다. 할아버지는 ‘귀한 손님들이 오니 이렇게 고마운 비가 내립니다. 그 동안 비금도는 너무 가물어서 농작물들이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흡족하게 웃으셨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선뜻 집으로 들인 할아버지의 인정에도 놀랍지만 방금 손님을 치르고도 또 손님이 왔는데 싫은 내색 하나 안 하시는 할머니의 마음 씀에 너무 감동했다. 할아버지는 현재 78세로 비금도에서 태어나서 20대까지 비금도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시다가 인천으로 옮겨가서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30년 넘게 인천에서 사셨다고 한다. 은퇴 후에 텃밭이나 가꾸면서 살려고 고향에 내려왔는데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떠나거나 죽었고 의외로 고향 사람들의 텃새가 심하여 마음 고생을 좀 했다고 하셨다. 교장 선생님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조만간 비금도 해안일주도로가 개통이 되고 그것을 축하하는 정자(亭子)의 낙성식(落成式)도 거행될 것이라고 하셨다. 지역 유지들이 정자 이름을 원래 비천정(飛天亭)이라고 정했는데 너무 상투적이라고 교장선생님이 반대하여, 개심정(開心亭) 즉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정자라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낙성식 날에 정자의 들보에 축하 시를 걸어야 하는데 시상이 안 떠올라서 너무 힘들다고 하셨다. 교장선생님은 육각 정자이니 여섯 가지 시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교장선생님은 시조를 짓고 있는데 내용이 너무 정적(靜的)이어서 도통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서 필자에게 보여 주셨다. 그때 옆에 있던 도사가 교장선생님 부부에게 필자를 정신과의사이자 작가라고 소개했다. 글을 쓰려고 전국을 떠도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에 교장선생님은 갑자기 안색이 너무 밝아지더니 당신께서 운전할 테니 개심정에 한번 가서 시상을 떠올려 보라고 하셨다. 교장선생님은 정말 장대비를 뚫고 차를 몰아서 우리를 개심정에 데리고 가셨다. 개심정은 바닷가 언덕 위에 있었다. 비록 우중이지만 전망이 탁 튀어서 마음이 확 열리는 것 같았다. 교장선생님은 바다 건너 아스라이 마주 보이는 섬들이 암태도, 자은도, 안좌도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고기잡이 배들이 오가는 바다 위의 무인도들의 이름을 하나씩 가르쳐 주셨다. 무인도 이름이 각각 북섬, 장고섬, 비아섬라고 했는데 비아는 비파의 전라도 사투리라고 하셨다. 풍류를 좋아하는 전라도 사람들답게 섬 이름도 악기 이름으로 지었다. 그리고 만조 때는 물에 잠기고 간조 때는 드러나는 바위가 있는데 그 이름이 ‘송씨 죽 막대기’라고 하였다. 비금도에 사는 송씨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죽을 쑤어 먹었는데 그 죽 쑤던 막대기 모양과 같아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조선 말의 가난과 아픔이 느껴졌다. 아무튼 교장선생님은 필자가 자신의 시조도 완성해 주고 필자의 시도 개심정 낙성식에 봉정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하셨다. 필자의 부담이 급격히 증가하는 순간이었다. 교장선생님은 개심정 오른쪽에 툭 튀어나온, 산이 바다로 급격하게 내리뻗는 기묘한 지형을 가리키며 그곳에 이세돌의 6대조가 묻혀있다고 하셨다. 그곳은 둘도 없는 명당이어서 이세돌 같은 위대한 바둑인이 나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셨다. 우리는 선생님의 차를 타고 다시 선생님의 집으로 돌아왔다. 장대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대문 옆에 새로 만든 작은 비석을 가리키면서 당신께서 20대 때 비금도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 뜻을 모아서 이 비석을 만들어 주었다고 하였다. 내용은 선생님의 은혜를 기리고 만수무강을 비는 것이었는데 2018년에 만들었다. 그 옆으로 지은 지 100년이 훨씬 넘은 듯한 비석이 둘이 있었는데 휼민불망비(恤民不忘碑)라는 글자는 뚜렷이 보였다. 선생님은 장대비를 맞아 가면서 두 비석의 글을 해석하고 설명해 주셨다. 1894년 전라도 순찰사 윤영신이 전라도 갑부 손응설을 설득하여 그의 사재를 털게 하여 흉년으로 굶어 죽어가던 비금도 주민들을 살렸다는 내용이었다. 필자와 도사는 선생님께서 장대비를 맞으면서 열강하시는 것을 도저히 우산을 쓰고 들을 수 없어서 같이 비를 맞으면서 들었다. 교장선생님은 타지의 젊은이(?)들에게 고향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소개하는 것에 무한한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필자는 평생 제자들을 가르치시던 그 열정이 그대로 느껴져서, 장대비 속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필자는 개심정 낙성식에 봉헌한 시를 지어 드리겠다는 무거운 약속을 하고 교장선생님과 헤어졌다. 비는 계속 오고 있었다. 그날 밤 필자는 교장선생님 부부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안주 삼아서 도사와 막걸리를 여러 병 비웠다. 다음날은 맑았다. 도사가 나여사님에게 전화를 했다. 전날 나여사님이 우리에게 염전에 대하여 가르쳐 주기로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나여사님은 차를 몰고 와서 우리를 당신의 염전으로 데리고 갔다. 여사님의 남편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분은 염전에 대하여 아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염전은 논과 그 구조가 비슷하다. 그런데 염전은 밭마다 높이가 미세하게 차이가 나는 계단식이다. 즉 바닷물 방금 퍼 올린 밭은 높은 곳에 위치하고, 물이 증발하여 염도가 높아지면 물을 서서히 낮은 곳에 위치한 밭으로 옮긴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방금 바닷물을 퍼 올린 밭에는 다슬기 같은 조개류가 살고 있었고 염도가 높아진 밭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밭과 밭 사이에 길고 낮은 파란색 지붕의 집 구조물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었는데 안에는 염수가 있었다. 이것의 용도는 비가 올 때 염전의 물을 끌어들여 보관하고 비가 그치면 다시 염전으로 내보내는 창고 역할이라고 한다. 염도가 높아지면 밭에 검은색 도기(陶器)타일를 깔거나 검은 고무 장판을 까는데 그 용도는 같다. 태양 복사열을 최대한 흡수하여 물을 빨리 증발시키기 위한 것이다. 소금이 완성되면 이를 퍼담고 이송하는 것도 대부분 기계화 자동화되어서 편해 보였다. 소금밭둑에 레일이 깔려 있어서 소금을 실은 카트(cart)를 밀어서 이동시키고 있었다. 나여사는 이렇게 생산한 소금을 1년 이상 창고에 저장한 후 판매한다고 하면서 소금창고를 보여 주었다. 생산 공정이 기계화 자동화 되어있다고 해도 비 오는 날이나 소금을 거두어 들이는 날은 바빠서 나여사의 남편은 집에 못 들어가고 농막 아니 소금막에서 자는 날도 많다고 한다. 나여사는 소금막에 우리를 안내하여 커피와 다과를 내놓았다. 두 분은 신안 소금이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고 말하면서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런데 악덕 중개업자들이 신안 소금과 중국 소금을 반반 섞어서 신안 소금이라고 속여서 싸게 팔아서 골치가 아프다면서 소금을 살 때 반드시 생산자와 바코드를 확인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염전을 논으로 바꾸는 방법도 설명해 주었는데 염전을 방치하면 높은 염도에 잘 자라는 염생식물 즉 함초, 갈대, 억새들의 씨들이 저절로 날아와서 자라고 이렇게 4년 정도 두면 염전의 소금기가 빠져서 벼농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나여사님은 도사가 경영하는 광주의 암요양병원에 입원했던 환자다. 나여사님은 전혀 암환자 같지 않게 건강하고 활기에 차 보였다. 원래 당신의 집을 우리의 숙소로 제공하려고 했었는데 갑자기 딸부부와 외손녀가 오는 바람에 우리에게 모텔을 안내했고 모텔비도 나여사가 냈다. 도대체 도사가 환자를 얼마나 친절하게 대우하고 효과적으로 진료를 했으면 퇴원한 환자가 담당했던 의사를 이렇게 극진히 대접하는 것일까? 도사에게는 타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아무튼 필자는 이번 여행에서 마음이 너무 순박한 전라도 사람들을 몇 분 만났다. 그분들의 고운 마음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여행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지만, 특히 순박한 사람들과의 아름다운 사연으로 우리의 여생을 채울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정말 좋은 것 같다. 2022년 6월 16일 김홍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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